(자작)시

'환벽당 ' (자작시'

언제나민들레 2015. 5. 13. 00:38

  사진(폰카) 2015. 05. 05 (화요일) '환벽당' -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담양 경계지)

 

 

 

'환벽당'

 



굽이치며 거칠어진 냇물이
조대바위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오랜세월 선비들의 발길에
잘 다듬어진 운치있는 돌계단
그 언덕 위에
다락 딸린 온돌방과
널찍한 대청마루 정자가 정겨웁다
그 옛날 어린 송강의 슬픔엔
쌍소나무도 함께 아파했을까
정원가득 꽃무릇 필무렵
굴뚝연기와 글읽는 소리는
얼만큼 조화로웠을 것인가
달빛이 연못에 머무르는 밤이면
잊혀져간 그리움들이
하얗게 일렁이겠다

 



ㅇ. 2015. 05. 05 (화요일) '환벽당'을 다녀온 후에..

 

 

ㅇ. 환벽당 : 사방이 푸르름으로 둘러졌다라는 의미로 이름지어졌다함.

 

    조선 명종 때 나주목사 등 여러차례 나라 벼슬을 하였던 사촌(沙村) 김윤제(1501년~1572년)가

지은 정자이다. 

   이곳은 김윤제와 송강 정철의 인연이 깃든 곳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잠시 낮잠이 들었던 김윤제의 꿈속에 청룡이 환벽당 바로 아래에 위치한

창계천의 용소에서 놀고 있으므로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하인을 시켜 

냇가를 살피고 오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그곳 조대바위 부근에는 어린 송강 정철(당시 14세)이 멱을 감고 있었다 한다.

 

   송강 정철(1536년~1593년 서울 장의동 태생)의 부친은 조그만 벼슬을 하고 있었고

큰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으며 셋째 누나가 왕족 계림군의 부인이었기에

정철도 어려서 부터 궁궐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리고 문정황후가 낳은 경원대군(훗날 명종)과도 소꿉동무로서 잘 어울려 지냈다.

 

  그런데 1545년 7월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인생에 파란이 일어난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일파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 일파를 제거하는

을사사화를 일어킨 것이다.

  이 사화에 정철의 매형이며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이 연루된다.

  윤원형이 윤임을 모함한다.

인종 승하 후에 윤임이 왕위를 계림군에게 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계림군이 미리 겁에 질려 도망을 가는 바람에 혐의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는 안변 황룡산 기슭에서 삭발하고 스님으로 숨어있다가 한달도 안되어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한다.

계림군의 처가인 정철 집안에도 그 불똥이튄다.

  정철의 부친과 이조정랑이였던 큰형이 각각 2차례 유배 보내지는 과정에서 

형은 매를 맞아 죽고 아버지의 유배생활이 풀릴때까지 정철은 글공부도 못하고 유배지에서

수년간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유배가 풀리자 가족들은 조부의 묘가 있는 담양군 남면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가정이 풍비박산 나자 둘째 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인 순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때 14세의 어린 송강 정철이 순천에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렸던 것이다.

 

  이와같이 김윤제가 어린 송강을 만나보니 기상과 재기가 넘쳐 보이므로 10년 이상

데리고 있으면서 공부를 시켰고 훗날 외손녀의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26세때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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