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있는 사진

'연계정' (풍경)

언제나민들레 2016. 1. 9. 22:05

 

 

  사진(폰카) 2016. 01. 03(일요일) '연계정'(漣溪亭) -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아래 연계정의 옛모습과 똑같이 신축했어요)

 

 

   (연계정의 옛모습)

 

 

 

 

 

 

 

 

 

 

 

 

 

 

 

 

 

 

 

 

 

 

 

 

 

 

 

 

 

0. 연계정(連溪亭) :

     조선시대 미암(眉巖) 유희춘(1513~1577)이 나라의 고위관직을 지내다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담양에 내려와 세운 정자이다.

 

0. 미암 유희춘 :

     조선 선조 때의 신하로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미암(眉巖), 별호는 연계(連溪)이다.

순천에서 해남으로 이사하여 은거불사한 유계린의 둘째 아들로 외조부는 금남 최부이며

취암 유성춘은 그의 큰형이다.

    그의 나이 26세 때인 1538(중종 33) 하서 김인후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

정언 등을 지냈다.

    그의 나이 35세 때인 1547년 을사사화(양재역 벽서사건 이기, 윤원형 등의 간신들이 명종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를 속여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약 20여년을 유배 생활하게 된다.

    1567년 선조 즉위와 함께 유배가 풀려 홍문관 교리에 재등용되어 어린

임금의 스승이 된다.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부제학, 전라감사 등 내외 고위관직을 거치며 김인후, 이황, 기대승, 이이 등과 교우하였으며 특히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과 교분이 두터워 그를 어의로 추천하기도 하였고 예조, 형조,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1577년 선조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여 입궁을 대기 하던중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 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절의 시호가 내려졌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의 없어졌으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미암일기(국가 보물 제 260)

남아 있다.

    부인은 이곳 산 이름을 문호로 한 홍주송씨 덕봉(宋德峰)이며

시문(時文)에 능하여 조선조 4대 여류문인(女流文人)으로 꼽힌다.

 

 

0. 송덕봉(宋德峰) :

    조선시대를 빛낸 여류시인들을 칭할 때 흔히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향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전남 담양 출신으로 이들을 훨씬 뛰어넘는 여성이 있었으니

송덕봉 여사가 바로 그녀이다.

    송덕봉은 1521(중종 16)1220일 전남 담양에서 아버지 송준과 어머니 함안이씨 사이에서

32녀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덕봉의 어머니는 연산군 때 대사간, 승지, 전라감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이인형의 딸이다.

    아버지 송준은 31세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참봉이 되었고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고 단성현감이 되었는데 단성현감에 부임한지 석달만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송덕봉의 집안은 서울에 까지 알려진 큰집안은 아니었으나 담양에 근거를 두고 계속 관직에

나아갔으며 학문과 기문에 힘쓴 지방의 명문이었다. 이처럼 학문과 시문에 힘쓰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영특했던 그녀는 경전과 역사책 등을 공부하며 자랐다.

   

   송덕봉은 16세 되던 해(1536년) 해남 출신으로 훗날 호남의 다섯 현인중 한사람으로 꼽히게 되는

미암 유희춘과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할 당시의 일화에 따르면 미암의 학식과 인품에 반한 덕봉은 결혼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데

미암의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반대하자 미암에게 신부집에 신행을 올 때 버선 신발에 두꺼운 솜을 켜켜이 포개신고 오도록 하였다 한다.

     이처럼 결혼 전부터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했던 미암과 덕봉은 시문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작품을 평가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미암은 부인을 놀리려고 시를 지었다.

 

     부인출호비선출(婦人出戶鼻先出)이라 - 부인이 문밖에 나감에 코가 먼저 나가더라

 이는 부인의 콧대가 세다는 것을 말함이었다.

 

     이에 질세라 덕봉이 화답하였다.

 

      부군행로앵소지(夫君行路櫻掃地)라 - 남편이 길을 다님에 갓 끈이 땅을 쓸더라

미암이 키가 작음을 곧바로 지적하는 기막힌 감각이고 재치가 넘치는 부인을 어찌 미암이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미암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자 덕봉은 시어머니 최씨를 모시고 서울로, 무장으로

남편의 벼슬살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따라다녔다. 

 

 

 

0. 미암일기 (국가 보물 제 260) :

     미암 유희춘의 일기로 11책이 남아있다.

     지금 남아 있는 책은 1567. 10. 1 ~ 1577. 5. 13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의 친필 일기이며 원래는 14책이었으나 11책이 남아있다.

    명종말 선조초의 여러가지 사건,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생활상, 본인의 홍문관, 전라도 감사, 사헌부 관원 등을 역임하면서 겪은 공무 외에도 사회, 경제, 풍속 등을 두루 기록하였다.

     제 1~ 10책은 모두 미암의 일기이며 제 11책은 미암과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일기는 이이의 경연일기와 함께 선조실록을 간행하는 역사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왕실의 이야기, 정국의 동향, 사신들의 접대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과 홍문관 경연에 관한 기록, 가계의 수입과 지출, 이사, 건축, 혼례풍습, 잔치, 아내와 자녀들의 이야기, 노비, , 서녀, 의녀, 기녀들의 이야기 등 16세기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

 

 

0. 미암이 아내 송씨에게 쓴 편지(1567)

    그의 아내 송씨의 답장 :

    (미암이 유배에서 풀려 다시 관직 생활을 한지 3-4개월 만에 아내에게 쓴 편지)

    ‘내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독수공방하며 당신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소라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자 미암의 아내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삼가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라고 스스로 자랑 하셨는데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다만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인데 그게 어찌 나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습니까. 또 중심이 굳게 정해지면 물욕이 끼어들기 어려워 자연히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인 내가 보은하기를 바라시는지요. 서너달 독수공방 했다고 고결한척 은혜를 베푼척 하신다면 당신은 결코 물욕에 무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결백하여 사념이 없다면 어찌 이렇게 꼭 편지를 보내 자랑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당신 곁에 당신을 알아주는 벗이 있고 아래로는 권속과 노복의 입으로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거늘 굳이 애써서 편지를 보낼것도 없겠지요. 짐작하건데 당신은 인의를 베푸는척 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 합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봄에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미암의 부인은 이곳 노루골의 뒷산 이름을 따 송덕봉이란 필명을 사용했는데 조선조 4대 여류문인

가운데 한명이다.

    아무튼 조선사대부 아내의 글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직설적인 편지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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